고등학교때로 기억하는데요.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당신이라는 당시에도 발간된지 오래된 시집한권을 우연히 읽게됩니다. 그 시집을 통해, 음악도 아닌 글자로만 만들어진 글도 사람의 마음속에 음악을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.


병으로 먼저 보낸 아내를 생각하며 만든 시라고 하던데, 자칫 신파로 흘러갈 수도 있었을 내용을 당시 10대인 제가 읽고도 큰 느낌을 받았을 정도로 감정의 경계를 잘 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. 올 가을, 또 왠지 스산한 이 느낌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이 책을 발견하곤 그때의 감동도 다시 느낍니다.

앞서 간
아내 구수경의 영전에
못다한 이 말들을 바칩니다.

로 시작하는 이 시집은 결코 슬픔이나 아픔, 외로움을 부각시키려 애쓰지 않습니다. 물론 비어있는 자리에 대한 끝없는 외로움을 토로하긴 하지만, 그 외로움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계속 독자에게도 외로움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은 없습니다.

우리가 버리지 못했던
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
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
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
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.
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
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
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
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

- 접시꽃 당신 中에서 -

10대 어린 나이에, 저 구절을 읽고 죽어가는 아내를 곁에 두고 저 글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? 하고 꽤 고민했던게 기억납니다. 당시 TV나 영화나 억지 눈물을 만들어 내던, 듣는 이, 보는 이에게 "이 타이밍에 눈물..."이라고 친절히 알려주던 그런 작품이 아니라, 저렇게도 슬픔을 표현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.


또 이 시집에서 전 10대때 한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 것도 있습니다.

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다 그러하겠지만
오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
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

- 오월편지 中에서 -

위 구절인데요. 고등학생이던 저는 왜 이땅에 오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많다는 거지? 6.25는 6월달인데... 하는 의문을 가지지요. 지금처럼 인터넷이 되는 것도 아니고, 입시공부와 관련없는 내용을 학교에 물을 수도 없어서 결국 그 때는 해결하지 못하고, 저 의문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. 해결할 수 없던 문제를 풀고 아마 그래서 저는 대학교 1학년때 소위 '운동권학생'이 되는가봅니다. 사실 정작 운동은 귀찮아서 안하는데 말입니다... (도대체 다이어트는 언제 하겠다는 건지....ㅜ.ㅜ)

당신있는 이곳으로 올 때면
내가 노랫소리나 발자국소리로
당신을 불러내러 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오
바람에 쓸리는 풀잎처럼 발자국소리 귀기울이며
모두 듣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드오

- 인차리3 中에서 -

물론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합니다. 시 제목의 인차리는 아내의 무덤이 있는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는데요. (찾아보진 않았습니다만..)


어릴때는 하긴 나이를 먹은 지금도 사소한 욕심에 조바심내는 제 모습을 보곤 스스로 한심해 지기도 하는데요.

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
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
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
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

-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中에서 -

그런 어린 마음에 저 구절은 너무 짠하게 다가 왔었지요. 어떤 도덕책의 구절이나 성경의 구절보다도 더 진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. 좀더 많은 걸 담을려면 좀더 큰 그릇이 필요한건 당연한데, 그러면 좀더 크게, 좀더 많이... 욕심은 끝없게 되는것도 당연한데, 그릇을 그냥 비워버리면 다시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까...

동정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사치이고, 다른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간인 모양입니다.

남자의 뽀얀 의수가 느리게 흔들리고
손가락 몇 개가 달아나고 없는 다른 손등으로
불꽃 자국 별처럼 깔린 얼굴 위
안경테를 추스리고 있었다
뭉그러진 남자의 가운데 손가락에 오래도록 꽂히는
낯선 내 시선을 끊으며
여자의 고운 손이 남자의 손을 말없이 감싸 덮었다

- 어떤 연인들 中에서 -

사실 이 시집 전체에서 눈물을 흘린 곳은 이 구절이었습니다. 한 손은 의수에 다른 손마저 손가락이 두개 뿐인 남자와 그 연인. 낯선이의 시선으로 부터 남자의 손을 보호해주는 고운 여자의 손...  나도 그렇게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... 지금은 오히려 내가 보호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 시집을 다시 읽으며 알았습니다. 사람은 참 약하다... 하는 생각도 합니다.


그저.. 가을이라 그런지 좀 센티해져서 10대때 읽었던 한 시집을 찾아 읽었습니다. 10대때 부모님 몰래 이불 뒤집어 쓰고 울었던 책이 딱 두 권이 있는데, 이 책이 그 중 한권이네요. 지금 읽으니 또 새롭습니다. 꽤 오래된 책입니다만... 혹시 안읽어보셨다면 살짝 한번 읽어보세요. 감정을 좀 건드리긴 하니, 이런것에 태생적으로 알러지 반응이 있으신 분들은 권하지 않습니다...^^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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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라라윈 2009/11/02 05:33

    가을과 시집이 무척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...
    어릴 적에는 시험봐야 할 과목으로, 논술 준비로 감흥없게 읽었는데..
    지금 다시 읽으면 다른 느낌일 것 같은데요... ^^

    • PinkWink 2009/11/02 06:45

      그러게요...
      가을은 이 공돌이도 시집을 읽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모양입니다...^^

  • 영웅전쟁 2009/11/02 08:35

    가을에 어울리는 책을 소개 하셨군요..
    그나저나
    올려주신 시간이 04:47 인데...
    일어나신 시간인지, 밤새운 것인지...
    가을이라 별개 다 궁금합니다 ㅋ
    잘보고 갑니다.
    이번주 멋지게 열어가시길 바랍니다.

    • PinkWink 2009/11/02 08:42

      사실은 어제 오후 2시인가에 잠들어서 밤9시쯤에 정신을 차리고 쭈욱 안자고 있는 중입니다.. 그나저나... 방금 Porto 와인에 대한 이야기 읽고 왔는데... 여길 와주셨네요^^

  • White Rain 2009/11/02 08:43

    도종환 시인이 암투병 중인 아내를 간호하며 적었던 시였죠. 국내에서 시집으로는 최초로 100만 부 이상 판매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. 저 역시 즐겨 읽었던 기억--^^ㅠㅠ

    당시 이해하지 못했던 정서를 지금은 충분히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답니다. 그래서 경험이 참 중요한가 봐요.

    11월 첫주 활기차게 시작하시고 추위도 조심하세요.

    • PinkWink 2009/11/02 08:49

      아아.. 시집으로는 최초로 100만부가 팔렸었군요...
      몰랐던 사실이었네요...
      네... White Rain님도 활기찬 11월 보내세요^^

  • 빨간내복 2009/11/02 09:20

    영화까지 나왔을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입니다. 도종환 시인은 그당시 학교 선생님이었죠.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.

    • PinkWink 2009/11/02 10:47

      맞아요.. 당시 학교선생님이었다고 했던것이 기억납니다...^^

  • 박재욱.VC. 2009/11/02 10:37

    아~ 감성적인 글까지 포스팅하시는군요. ^^
    가을이라 그런지 더 와닿는 글이네요. 뭔가 훈훈한 느낌입니다.

    좋은 글 감사합니다. ^^

    • PinkWink 2009/11/02 10:47

      ㅎㅎ 훈훈하나요? 큭...
      아마 솔로로 맞이하는 가을이라 감성적인가바요..ㅋㅋ^^

  • 초록누리 2009/11/02 10:38

    접시꽃 당신 저도 표지가 많이 헤지도록 들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...
    다시 읽어도 좋네요.
    가슴에 와 닿는게...당시에 화제가 되었던 베스트셀러였답니다.

    • PinkWink 2009/11/02 10:48

      네... 그러고 보니
      확실히 베스트셀러가 맞긴 맞군요..
     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다니 말입니다...ㅎㅎ^^

  • 바람처럼~ 2009/11/02 14:57

    시집까지!!!
    음~ 저는 비록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대딩인데도 아직도 아리송해보이네요 ^^
    그래도 시 잘 읽고 갑니다

    • PinkWink 2009/11/03 02:44

      감사합니다^^.. 이 가을에 한번 읽어보시지요...^^

  • boramina 2009/11/02 15:26

   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던 다른 한 권의 책이 궁금하네요.

    댓글을 달 수 있는 포스팅이 올라와서 안도했다면 믿으시겠어요?ㅎㅎ
    공업 수학은 너무 어려워요ㅠㅠ

    • PinkWink 2009/11/03 02:44

      ㅎㅎ... 제가 올리는 이상한 수학관련들은 그리 신경쓰시지 않아도 됩니다...^^ 오히려 댓글이 달리는게 더 이상하지요^^

  • 한수지 2009/11/02 17:04

    접시꽃당신... 맞아요.. 생각키우네요
    잘 보고갑니다 *^^*

  • 빛이드는창 2009/11/02 17:08

    구절구절 너무 좋네요.... 이제라도 이렇게 좋은 시집을 알게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.
    한사람을 보낼 수 밖에 없는 남겨질 이의 마음이... 그 사랑이 느껴지네요. 접시꽃 당신....

    • PinkWink 2009/11/03 02:47

      10대때는 그냥 슬픔을 받아들이고 공명한 것이라면
      지금읽는 이 시집은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오네요...^^

  • 초인 2009/11/03 02:18

    시가 가슴을 후벼 파는군요,,,하하;;;

    • PinkWink 2009/11/03 02:48

      ^^... 초인님께서 오셨네요^^
      방갑습니다...^^

  • 아고라 2009/11/03 11:52

    저도 '어떤 연인들' 을 읽으면서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로 마음아파했던 기억이...핑크윙크님을 눈물짓게 한 또 한권의 시집이 궁금하네요. ^^

    • PinkWink 2009/11/04 05:45

      음... 또다른 책은... 시집이 아니라... 동화였는데요...
      플란더스의 개... 라는.....^^

  • 멀티라이프 2009/11/04 01:05

    떄론 문화생활도 하시는군요 ㅎㅎ
    공부만 하시는줄 알았어요~ ㅎ
    깊어가는 가을에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말이에요~~힘드네요~ ㅎㅎ

    • PinkWink 2009/11/04 05:46

      ㅎㅎ.. 요즘의 문화생활이 아니라...
      예전 어릴때의 문화생활을 좀... 회상한것이에요... ^^

  • gk 2009/11/04 15:22

    저는 수능때 시가 부분 다틀려서 그런지 참 시는 먼존재로만..ㅠ.ㅠ

    • PinkWink 2009/11/05 05:27

      저도 시가 편하게 와닿는 사람은 아닙니다만...^^

  • 탐진강 2009/11/04 23:14

    접시꽃당신은 정말 많은 사람들은 감동시켰었죠...

    • PinkWink 2009/11/05 05:28

      확실히 이 시집은 베스트셀러가 맞았나봐요...^^

  • casablanca 2009/11/19 19:58

    시와 문학을 좋아 했었는데 이젠 언제 시집 한권 읽었나 싶습니다.
    남겨진 하루를 마지막 날인듯 살수 있는 처절함이 가슴에 느껴지네요.

    • PinkWink 2009/11/20 07:56

      저도 항상 마지막 날인듯 치열하게 살아야할텐데..
      항상 느긋합니다... 왜 그런지... 에휴~~~~

  • 클라리사 2009/12/07 04:56

    시를 종종 읽는 편이었는데도, 이 시집은 들춰보지도 않았어요.
    워낙 인기있었던 시집이어서 괜한 오기때문이었던 것 같아요.

    남학생들도 이렇게 이불 속에서 뒤척이기도 하는군요^^
    잠 못 이루게 한 다른 한 권의 책이 저도 궁금~~~